본문

[JERIReport] 사재 털어 만든 박물관·식물원, 정부가 운영비는 대줘야 [중앙일보]
htm_2007020617575850005010-001.JPG
관련링크
큰 자연사박물관이나 식물원은 '돈 먹는 하마'다. 관람객들이 내는 입장료는 운영비에 턱없이 모자란다. 이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돈 좀 번 어떤 사람이 자수성가했다며 이런 것들을 세워 '폼' 좀 잡아보려 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있는 재산 다 날리기 십상이요, 고생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공헌이라는 투철한 의식 없이 개인이 하기는 쉽지 않다.

충남 공주시 계룡산 자락에 있는 계룡산자연사박물관 설립자인 고(故) 이기석 박사(2005년 타계 당시 82세)와 경기도 용인의 한택식물원 이택주(65) 원장은 그런 점에서 다시 쳐다보게 되는 사람들이다. 국가조차 돈이 많이 들어 주저하는 공익사업을 수백억원의 사재를 털어 시작한 것이 그렇고, 투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생 모은 재산을 돈 안 되는 곳에 던져넣은 것이 닮은꼴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자연사박물관.식물원의 규모와 열정에 취재기자가 깜짝 놀란 것도 같다. 우리나라에는 국립 자연사박물관이 없고, 국립 광릉수목원의 경우도 일반에 제한적으로 공개할 뿐이다. 과학을 강조하는 10대 경제대국이라는 찬사에 가려진 부끄러운 일면이다. 누구나 가볼 수 있는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은 과학 인프라의 기본 중 기본이다.

처음 계룡산자연사박물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촌에 자그마한 건물 한 채 지어 취미로 수집해 놓은 표본을 전시하는 수준 정도로 생각했다. 거의 모든 국내 사설 박물관이 그렇기 때문이다. 1만2000여 평의 부지에 건평 4000여 평의 박물관에는 '국보급' 표본이 가득했다. 한글 이름의 공룡을 처음 세계 공룡 목록에 올린 '천우호연 공룡'화석을 비롯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미라, 전 세계에서 수집된 각종 광물 등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수장하고 있는 표본은 25만 점이나 된다고 한다. 구립이나 시립, 대학에서 운영하는 자연사박물관이 있긴 하지만 계룡산자연사박물관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

한택식물원은 동양 최대다. 1만 종에 가까운 나무와 풀(초본류) 종류가 20만 평의 부지에 심어져 있다. 이 원장이 건설업으로 번 돈을 몽땅 쏟아부어 20여 년 동안 가꾼 정통 식물원이다. 한국의 산야는 물론 전 세계 식물원 등을 몸소 돌며 품종을 채집해 만들었다. 이 역시 처음에는 뒷동산에 취미로 꽃나무나 관상수 정도를 심어놓은 곳으로 알았다. 그를 만나려면 사무실이 아닌 식물원 안의 작업현장으로 가야 한다. 작업복에 검게 그을린 얼굴, 창이 큰 카우보이 모자를 쓴 사람이 있으면 십중팔구 그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금방 주판알을 튕길지 모른다. 계룡산자연사박물관은 정부가 건설하는 행정도시에 가깝고, 한택식물원은 땅값 뛰기로 유명한 지역이니 땅 투자로는 그만 한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재단법인을 세워 그곳에 박물관이나 식물원 재산을 몽땅 내놓으면 전혀 딴 이야기가 된다. 재단법인은 설립목적 외의 용도로 재산을 사용하기 어렵고, 재단이 해체되면 그 재산은 전부 국고로 들어간다. 죽으나 사나 박물관과 식물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박사나 이 원장 같은 이는 투자 관점에서 보면 박물관.식물원을 세우는 것도 모자라 재단법인으로 만들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로 비칠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식들까지 대를 잇게 하고 있다. 이 박사의 며느리는 박물관학을 다시 공부해 관장직을 맡고 있고, 이 원장의 외아들도 대학원에서 식물학을 전공한 뒤 식물원 구석구석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의 운영비를 아끼기 위해 한겨울에도 사무실에 난로를 잘 피우지 않고, 한 개에 몇 백원 하는 모종을 키워 팔아 모자라는 운영비를 충당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게 '과학 한국'의 현주소다. 과학 훈장이라도 이들에게 먼저 돌아간다면 그 노고와 헌신에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중앙일보]2007.02.06 (화) 오후 5:55